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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야구 원폭과 차별을 넘어 불멸의 3085안타… 장훈 별세

관리자 각티비 2026-09-10 14:45 13 0
6437283_1_10bbd6e2.webp2009년 WBC 당시 한국-대만전 시구자로 나선 장훈. 연합뉴스

[스포츠경향 심진용 기자] 일본프로야구(NPB) 통산 최다 안타 기록을 보유한 ‘안타제조기’ 장훈(일본명 하리모토 이사오)이 9일 별세했다. 향년 86세. 일본 TBS는 10일 장훈이 전날 오후 5시쯤 도쿄 한 병원에서 숨을 거뒀다고 보도했다. 장훈은 1959년부터 1981년까지 일본프로야구(NPB)에서 23시즌을 뛰며 통산 3085안타를 때렸다. NPB 통산 3000안타는 장훈이 유일하다.

재일동포 2세인 장훈은 1940년 일본 히로시마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네 살 때 화상 사고로 오른손을 심하게 다쳐 손가락이 서로 붙고 굽는 장애가 남았다.

야구를 시작한 건 초등학교 5학년 때다. 원래 오른손잡이였지만 화상 때문에 왼손으로 공을 던지고 방망이를 치는 법을 익혔다. 남들보다 몇 배 더 많은 노력으로 장애를 극복했다.

장훈이 프로야구 선수를 꿈꾼 건 어머니 때문이었다. 히로시마 원정을 온 요미우리 선수들이 접시 가득 스테이크를 먹는 모습을 보고 “어머니에게도 저런 음식을 먹여드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난 뒤 어머니 박순분씨가 곱창구이 포장마차를 하며 자식들을 키웠다. 장훈은 “어머니가 잠든 모습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장훈은 오사카 야구 명문 나니와상고를 나와 1959년 도에이(현 닛폰햄)에 입단했다. 여러 구단이 영입 경쟁을 벌였다. 장훈은 히로시마 판잣집까지 찾아와 정성을 보인 도에이를 택했다. 입단 계약금 200만엔은 봉투도 뜯지 않고 어머니에게 건넸다.

장훈은 1959년 프로 첫해부터 신인왕을 차지했다. 처음에는 프로 투수들의 공을 공략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매일 새벽 방망이를 들고 나가 손에 피가 나도록 타이어를 때리며 훈련했다. 장훈은 호방한 성격과 달리 남에게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기는 부끄러워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보다 늘 두 배, 세 배 더 노력했기 때문에 선수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고 했다.

6437283_2_3684ccdb.webp장훈. 게티이미지

장훈의 별명은 ‘안타 제조기’였다. 프로 데뷔한 1959년부터 1978년까지 20시즌 연속 100안타 이상을 때렸다. 특유의 ‘광각 타법’으로 그라운드 곳곳으로 안타를 날렸다. 프로 3년 차인 1961시즌 타율 0.336으로 처음 타격왕에 올랐다. 1967~1970년 4시즌 연속을 포함해 7차례 타격왕 타이틀을 차지했다. 올스타에는 18차례 선정됐고, 베스트나인은 16차례 수상했다. 1962시즌에는 타율 0.333 31홈런 99타점으로 퍼시픽리그 최우수선수(MVP)에 뽑혔고, 도에이의 일본시리즈 우승도 이끌었다.

장훈은 1976년 일본 최고 인기 구단 요미우리로 이적했다. 전설적인 홈런왕 오 사다하루(왕정치)와 함께 중심타선을 이루며 ‘OH포(오·하리모토)’로 불렸다. 장훈이 안타를 치고 나가면 오가 홈런으로 점수를 뽑았다. 두 사람은 1976~1977시즌 요미우리의 센트럴리그 2연패를 이끌었다.

동갑내기인 데다 각각 한국계와 중국계로 일본 사회에서 ‘이방인’이라는 정체성까지 공유했던 두 사람은 평생 끈끈한 인연을 이어갔다. 2024년 열린 요미우리의 ‘오 사다하루 데이‘에 장훈은 지팡이를 짚고 마운드에 올라 시구했다. 당시 그는 “오는 18세 때부터 절친한 동갑내기다. 주위에선 말렸지만 기어서라도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장훈은 마흔 살 되던 1980년 마침내 3000안타 금자탑을 쌓았다. 5월28일 한큐전에 롯데 2번 지명타자로 출전한 장훈은 첫 타석에서 통산 2999번째 안타를 때려냈다. 그리고 6회말 네 번째 타석, 장훈은 한큐 야마구치 다카시가 던진 초구 직구를 잡아당겨 오른 담장을 훌쩍 넘겼다. 전인미답의 통산 3000안타를 홈런으로 장식한 장훈은 헬멧을 벗어 던지고 펄쩍펄쩍 뛰며 온몸으로 기쁨을 토해냈다. 축포 15발이 터졌다. 황금빛 박이 갈라지면서 ‘3000안타 축하’라고 쓴 현수막이 펼쳐졌다. 관중석에서는 온갖 색깔의 테이프가 쏟아졌다. 경기 후 그는 어머니의 손을 이끌고 다시 그라운드에 나와 홈팬들의 환호에 답했다.

6437283_3_bfbfd00c.webp장훈이 1980년 5월28일 통산 3000안타를 홈런으로 장식한 뒤 기뻐하고 있다. 연합뉴스

6437283_4_03a654ea.webp장훈이 2009년 미국 시애틀에서 이치로 스즈키를 만나 대화하고 있다. 게티이미지

장훈은 통산 타율 0.319와 3085안타를 남기고 1981년 은퇴했다. 이후 이치로 스즈키가 NPB와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통산 4367안타를 기록했지만, NPB에서만 3000안타를 쌓은 선수는 장훈뿐이다. 장훈은 정교함뿐 아니라 장타력과 주루 능력까지 갖춘 타자였다. 통산 504홈런과 319도루를 기록했다. NPB에서 500홈런과 300도루를 모두 달성한 선수도 그가 유일하다. 일본 ‘주간 베이스볼’은 장훈의 홈런 기록이 이치로의 미·일 통산 235홈런을 크게 웃돈다며 두 사람의 타격 유형에는 차이가 있다고 평가했다.

장훈은 재일교포로 차별을 겪으면서도 자신의 뿌리를 숨기지 않았다. 현역 시절 귀화 권유도 마다하고 오랫동안 한국 국적을 유지했다. 그러다 2024년 산케이신문 인터뷰에서 “수년 전 국적을 바꿔 지금은 일본 국적“이라고 처음 밝혔다. 장훈은 당시 한국 정부와 야구계에 섭섭함을 드러내면서도 “부모의 핏줄을 이어받아 재일교포로서 자부심을 품고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장훈은 히로시마 원자폭탄 피폭자이기도 했다. 다섯 살이던 1945년 8월6일, 폭심지에서 2.3㎞ 떨어진 집에서 어머니, 작은누나와 함께 피폭됐다. 큰누나는 근로동원으로 시내에서 일하다 화를 당했다. 온몸에 화상을 입은 채 가족과 재회했지만 결국 숨졌다.

장훈은 오랫동안 피폭 사실을 공개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았으나 말년에는 자신의 경험을 알리며 전쟁과 원폭의 참상을 증언했다. 2020년 마이니치신문 인터뷰에서 그는 “누나는 ‘뜨거워, 뜨거워’라는 말을 의식 없이 되풀이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어린 장훈은 포도알을 으깨 누나의 입가에 즙을 짜 넣었지만 더는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큰누나가 그날 숨졌다는 사실도 십수 년이 흐른 뒤에야 알았다.

은퇴 후 장훈은 TBS에서 야구 해설위원으로 오랫동안 활동했다. 거침없는 논평으로 인기를 얻었다. 잘못한 선수에게 던지는 호통, ‘카쓰(喝·갈)’는 그를 상징하는 말이 됐다. 특유의 직설적인 화법으로 여러 차례 논란도 빚었지만 일본 야구계의 원로로 널리 존경을 받았다.

한국 야구와도 인연이 깊었다. 한국프로야구 출범 원년인 1982년부터 2005년까지 총재특별보좌를 맡았고, 재일교포 선수들의 한국 진출도 도왔다. 체육발전에 기여한 공로와 한일 양국의 가교 역할을 인정받아 1980년 체육훈장 맹호장, 2007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심진용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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