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구 '리틀 김연경' 손서연이 깨운 한국 여자배구의 희망
[김양희 한겨레신문 기자 [email protected]]
U-17 세계선수권에서 득점 공동 2위 오르며 한국 6위 이끌어
겁 없이 세계 무대 누빈 10대들의 '유쾌한 반란'…"한국 배구, 제2의 전성기 맞을 것"
'김연경'이라는 거대한 태양이 떠난 자리의 그늘은 생각보다 훨씬 짙고 길었다. 여자배구 국가대표팀은 국제배구연맹(FIVB) 발리볼네이션스리그(VNL)에서 2022년과 2023년 연이어 전패(12패)를 당했고 2024년 2승10패, 2025년 1승11패의 처참한 성적을 내면서 결국 VNL 잔류 및 참가 자격을 잃고 하위 리그로 강등됐다. 도쿄 올림픽 4강의 영광 재연은커녕 2024 파리 올림픽 본선 무대는 밟아보지도 못했다. 아시아에서조차 중국, 일본은 물론이고 태국, 베트남 등에도 고전한다. 8월18일 현재 여자배구 세계랭킹은 27위. 일본은 6위, 중국은 7위, 그리고 태국이 17위다.
V리그도 냉정해졌다. 국내 선수들이 아시아쿼터에게마저 기량이 밀리기 시작하자 연봉 체계에 칼질을 했다. 2026~27 시즌부터 받을 수 있는 개인 연봉 상한액이 종전 8억2500만원(연봉 5억2500만원+옵션 3억원)에서 5억4000만원(연봉 4억2000만원+옵션 1억2000만원)으로 2억8500만원 줄어들었다. 무려 34.5% 삭감된 것이다.
여기에 더해 2027~28 시즌부터는 아시아쿼터가 1명에서 2명으로 늘어난다. 저출산으로 인한 인구 절벽, 학원 스포츠의 저변 수축, 체육활동을 외면하는 사회 분위기까지 더해지며 배구계 안팎에서는 "한국 여자배구에 미래는 없다"는 자조 섞인 한숨마저 나왔다. '김연경 유니버스'로 한때 프로야구 인기마저 위협했던 여자배구가 김연경 은퇴 이후 세대 교체에도 실패하며 상황이 점점 나빠지는 모양새였다.
17세 이하 여자배구대표팀 에이스 손서연 ⓒ뉴스뱅크
"부담감 없다면 거짓말, 기대 잘 알아" 스타성과 대범함도
여자배구 위기론의 색깔이 짙어질수록 다른 한쪽에서는 조용히 희망이 싹트고 있었다. 칠레 산티아고 국립 스타디움파크코트에서 열린 2026 국제배구연맹(FIVB) 17세 이하(U-17) 여자세계선수권대회가 그 무대였다. 10대 선수들은 최종 6위라는 성적과는 별개로 얼어붙어 있던 배구판에 새롭고 신선한 공기를 불어넣었다. 그들 중 아웃사이드 히터인 선명여고 1학년 손서연은 단연 돋보였다.
손서연은 공격수치고는 큰 키(181cm)가 아니지만, 코트 위에서 보여준 과감한 공격과 경기 운영으로 왜 그가 지금 '리틀 김연경'이라 불리는지 납득하게 했다. 손서연은 이번 대회 7경기에서 179득점을 올리며 대회 전체 득점 공동 2위에 올랐다. 공격 성공률도 41.24%로 득점 상위 10명 가운데 세 번째로 높았다. 높은 블로킹 벽을 뚫어내는 공격, 코트 구석을 찌르는 판단, 몸을 던지는 디그까지 손서연의 플레이는 '유망주'라는 말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웠다. 성장판이 아직 열려 있어 앞으로 키는 더 자랄 가능성이 크다. 한 배구계 관계자는 "스타성도 있어 보이고, 키가 185cm 정도만 되면 괜찮을 것 같다"고 했다. 현재 여자배구 대표팀의 주장이자 아웃사이드 히터인 강소휘(한국도로공사)의 키 역시 181cm다.
손서연은 김연경과도 인연이 있다. 그는 중학교 3학년 시절이던 지난해 U-16 아시아선수권에서 141점을 폭격하며 한국을 45년 만에 연령별 대회 우승으로 이끌고 득점왕과 최우수선수(MVP)를 휩쓸었다. 손서연의 가능성을 일찌감치 알아본 김연경재단(KYK파운데이션)은 그를 장학생으로 선발해 훈련을 지원했고, 대한배구협회는 이탈리아 단기 연수 기회를 마련했다. 그렇게 쌓인 경험은 세계 무대에서 차세대 간판 후보라는 존재감으로 이어졌다.
주변의 쏟아지는 관심과 '리틀 김연경'이라는 수식어가 16세 소녀의 어깨를 짓눌렀을 법도 하다. 그러나 손서연은 당차다. "부담감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그만큼 기대를 걸어주시는 것이니 더 잘해야겠다. 공수를 겸비한 파이팅 넘치는 선수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한국 여자배구의 다음 10년을 책임질 대범함이 묻어난다.
한국 17세 이하 여자배구 대표팀이 8월9일(한국시간) 칠레에서 열린 2026 U-17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이탈리아를 상대로 득점을 올린 뒤 즐거운 세리머니를 펼치고 있다. ⓒ뉴시스
이서인·최민주 등 발랄한 세리머니…경기를 즐겨
손서연뿐만 아니라 정교한 토스를 보여준 세터 이서인, 블로킹 능력을 뽐낸 최민주 등 세계선수권에 참가한 어린 선수들의 마음가짐은 예전과는 달랐다. 득점이 터질 때마다 코트 위에 동그랗게 모여 강강술래를 하고, 카메라를 향해 손흥민의 '찰칵' 세리머니를 선보였다. 코트는 마치 그들의 놀이터와 같았다. "지금 아니면 언제 해보겠냐"며 신나게 세리머니를 준비했다는 손서연의 말처럼, 그들은 세계대회라는 무대 자체를 진심으로 즐겼다. 스포츠가 원래 이런 것이었다는 사실을 아이들이 먼저 보여줬다. '혼자'가 아닌 '함께' 이룬 것이어서 여자배구에는 더 희망이 있다.
17세 이하 대표팀을 이끈 이승여 감독(금천중)의 지도력도 물론 빼놓을 수 없다. U-16 아시아선수권대회 우승도 이끌었던 이 감독은 사춘기 소녀들이 흔들릴 때마다 중심을 잡아주고 마음껏 뛸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줬다. 대회 직후 이 감독은 "이번 대회를 통해 한국 배구의 장래가 밝다는 것을 재확인했다. 한국 여자배구는 곧 제2의 전성기를 맞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승여 감독은 한국 배구 위기론 또한 정면으로 반박한다. "저출산으로 인구 저변이 얇아진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한국 배구의 국제 경쟁력이 끝났다는 것은 편견이다. 요즘 아이들의 신체 조건, 경기력, 훈련 환경은 예전보다 훨씬 좋아졌다. 훈련 방식과 체계적인 준비 체계만 갖춰진다면 시니어 무대에서도 충분히 세계와 겨룰 수 있다."
문제는 저출산만이 아닐지 모른다. 여자배구의 위기는 시스템의 부재, 그리고 패배주의에 빠져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기회와 환경을 제공하지 못한 어른들의 책임일 수 있다. 이 감독이 "이번 경험을 발판 삼아 더 성장한다면 시니어 국제 무대에서도 충분히 경쟁력을 보일 수 있다"고 말한 이유이기도 하다.
연봉 삭감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저출산의 우려 속에서도 여자배구계의 새로운 피는 흐르고 있었다. 김연경의 장학금을 받았던 손서연과 동료들은 코트에서 그 가능성을 증명했다. 손서연이 제2의 김연경이 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지금의 한국 여자배구가 필요한 것은 또 한 명의 배구 영웅이 아니라, 손서연 같은 선수들이 낙오 없이 계속 성장할 수 있는 구조다.
이제 공은 어른들의 코트로 넘어왔다. 10대의 나이에 배구의 즐거움과 세계적 경쟁력을 스스로 증명해낸 이 아이들이 성인 무대에 연착륙하고, 더 넓은 세계로 도약할 수 있도록 단단한 판을 깔아주는 것. 그것이 지금 한국 배구계가 제일 먼저 풀어야만 하는 숙제다. 여자배구의 전성기는 끝난 것이 아니라, 어쩌면 이제 막 제2막을 향해 요동치기 시작한 것인지도 모른다.
U-17 세계선수권에서 득점 공동 2위 오르며 한국 6위 이끌어
겁 없이 세계 무대 누빈 10대들의 '유쾌한 반란'…"한국 배구, 제2의 전성기 맞을 것"
'김연경'이라는 거대한 태양이 떠난 자리의 그늘은 생각보다 훨씬 짙고 길었다. 여자배구 국가대표팀은 국제배구연맹(FIVB) 발리볼네이션스리그(VNL)에서 2022년과 2023년 연이어 전패(12패)를 당했고 2024년 2승10패, 2025년 1승11패의 처참한 성적을 내면서 결국 VNL 잔류 및 참가 자격을 잃고 하위 리그로 강등됐다. 도쿄 올림픽 4강의 영광 재연은커녕 2024 파리 올림픽 본선 무대는 밟아보지도 못했다. 아시아에서조차 중국, 일본은 물론이고 태국, 베트남 등에도 고전한다. 8월18일 현재 여자배구 세계랭킹은 27위. 일본은 6위, 중국은 7위, 그리고 태국이 17위다.
V리그도 냉정해졌다. 국내 선수들이 아시아쿼터에게마저 기량이 밀리기 시작하자 연봉 체계에 칼질을 했다. 2026~27 시즌부터 받을 수 있는 개인 연봉 상한액이 종전 8억2500만원(연봉 5억2500만원+옵션 3억원)에서 5억4000만원(연봉 4억2000만원+옵션 1억2000만원)으로 2억8500만원 줄어들었다. 무려 34.5% 삭감된 것이다.
여기에 더해 2027~28 시즌부터는 아시아쿼터가 1명에서 2명으로 늘어난다. 저출산으로 인한 인구 절벽, 학원 스포츠의 저변 수축, 체육활동을 외면하는 사회 분위기까지 더해지며 배구계 안팎에서는 "한국 여자배구에 미래는 없다"는 자조 섞인 한숨마저 나왔다. '김연경 유니버스'로 한때 프로야구 인기마저 위협했던 여자배구가 김연경 은퇴 이후 세대 교체에도 실패하며 상황이 점점 나빠지는 모양새였다.
17세 이하 여자배구대표팀 에이스 손서연 ⓒ뉴스뱅크"부담감 없다면 거짓말, 기대 잘 알아" 스타성과 대범함도
여자배구 위기론의 색깔이 짙어질수록 다른 한쪽에서는 조용히 희망이 싹트고 있었다. 칠레 산티아고 국립 스타디움파크코트에서 열린 2026 국제배구연맹(FIVB) 17세 이하(U-17) 여자세계선수권대회가 그 무대였다. 10대 선수들은 최종 6위라는 성적과는 별개로 얼어붙어 있던 배구판에 새롭고 신선한 공기를 불어넣었다. 그들 중 아웃사이드 히터인 선명여고 1학년 손서연은 단연 돋보였다.
손서연은 공격수치고는 큰 키(181cm)가 아니지만, 코트 위에서 보여준 과감한 공격과 경기 운영으로 왜 그가 지금 '리틀 김연경'이라 불리는지 납득하게 했다. 손서연은 이번 대회 7경기에서 179득점을 올리며 대회 전체 득점 공동 2위에 올랐다. 공격 성공률도 41.24%로 득점 상위 10명 가운데 세 번째로 높았다. 높은 블로킹 벽을 뚫어내는 공격, 코트 구석을 찌르는 판단, 몸을 던지는 디그까지 손서연의 플레이는 '유망주'라는 말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웠다. 성장판이 아직 열려 있어 앞으로 키는 더 자랄 가능성이 크다. 한 배구계 관계자는 "스타성도 있어 보이고, 키가 185cm 정도만 되면 괜찮을 것 같다"고 했다. 현재 여자배구 대표팀의 주장이자 아웃사이드 히터인 강소휘(한국도로공사)의 키 역시 181cm다.
손서연은 김연경과도 인연이 있다. 그는 중학교 3학년 시절이던 지난해 U-16 아시아선수권에서 141점을 폭격하며 한국을 45년 만에 연령별 대회 우승으로 이끌고 득점왕과 최우수선수(MVP)를 휩쓸었다. 손서연의 가능성을 일찌감치 알아본 김연경재단(KYK파운데이션)은 그를 장학생으로 선발해 훈련을 지원했고, 대한배구협회는 이탈리아 단기 연수 기회를 마련했다. 그렇게 쌓인 경험은 세계 무대에서 차세대 간판 후보라는 존재감으로 이어졌다.
주변의 쏟아지는 관심과 '리틀 김연경'이라는 수식어가 16세 소녀의 어깨를 짓눌렀을 법도 하다. 그러나 손서연은 당차다. "부담감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그만큼 기대를 걸어주시는 것이니 더 잘해야겠다. 공수를 겸비한 파이팅 넘치는 선수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한국 여자배구의 다음 10년을 책임질 대범함이 묻어난다.
한국 17세 이하 여자배구 대표팀이 8월9일(한국시간) 칠레에서 열린 2026 U-17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이탈리아를 상대로 득점을 올린 뒤 즐거운 세리머니를 펼치고 있다. ⓒ뉴시스이서인·최민주 등 발랄한 세리머니…경기를 즐겨
손서연뿐만 아니라 정교한 토스를 보여준 세터 이서인, 블로킹 능력을 뽐낸 최민주 등 세계선수권에 참가한 어린 선수들의 마음가짐은 예전과는 달랐다. 득점이 터질 때마다 코트 위에 동그랗게 모여 강강술래를 하고, 카메라를 향해 손흥민의 '찰칵' 세리머니를 선보였다. 코트는 마치 그들의 놀이터와 같았다. "지금 아니면 언제 해보겠냐"며 신나게 세리머니를 준비했다는 손서연의 말처럼, 그들은 세계대회라는 무대 자체를 진심으로 즐겼다. 스포츠가 원래 이런 것이었다는 사실을 아이들이 먼저 보여줬다. '혼자'가 아닌 '함께' 이룬 것이어서 여자배구에는 더 희망이 있다.
17세 이하 대표팀을 이끈 이승여 감독(금천중)의 지도력도 물론 빼놓을 수 없다. U-16 아시아선수권대회 우승도 이끌었던 이 감독은 사춘기 소녀들이 흔들릴 때마다 중심을 잡아주고 마음껏 뛸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줬다. 대회 직후 이 감독은 "이번 대회를 통해 한국 배구의 장래가 밝다는 것을 재확인했다. 한국 여자배구는 곧 제2의 전성기를 맞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승여 감독은 한국 배구 위기론 또한 정면으로 반박한다. "저출산으로 인구 저변이 얇아진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한국 배구의 국제 경쟁력이 끝났다는 것은 편견이다. 요즘 아이들의 신체 조건, 경기력, 훈련 환경은 예전보다 훨씬 좋아졌다. 훈련 방식과 체계적인 준비 체계만 갖춰진다면 시니어 무대에서도 충분히 세계와 겨룰 수 있다."
문제는 저출산만이 아닐지 모른다. 여자배구의 위기는 시스템의 부재, 그리고 패배주의에 빠져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기회와 환경을 제공하지 못한 어른들의 책임일 수 있다. 이 감독이 "이번 경험을 발판 삼아 더 성장한다면 시니어 국제 무대에서도 충분히 경쟁력을 보일 수 있다"고 말한 이유이기도 하다.
연봉 삭감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저출산의 우려 속에서도 여자배구계의 새로운 피는 흐르고 있었다. 김연경의 장학금을 받았던 손서연과 동료들은 코트에서 그 가능성을 증명했다. 손서연이 제2의 김연경이 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지금의 한국 여자배구가 필요한 것은 또 한 명의 배구 영웅이 아니라, 손서연 같은 선수들이 낙오 없이 계속 성장할 수 있는 구조다.
이제 공은 어른들의 코트로 넘어왔다. 10대의 나이에 배구의 즐거움과 세계적 경쟁력을 스스로 증명해낸 이 아이들이 성인 무대에 연착륙하고, 더 넓은 세계로 도약할 수 있도록 단단한 판을 깔아주는 것. 그것이 지금 한국 배구계가 제일 먼저 풀어야만 하는 숙제다. 여자배구의 전성기는 끝난 것이 아니라, 어쩌면 이제 막 제2막을 향해 요동치기 시작한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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