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한국의 '은인' 나고야, 국제종합대회 첫 개최 [권종오의 IMAGINE 나고야]
88올림픽 개최권 서울에 내준 도시, 엑스포로 만회
16일 남자 농구 한국과 요르단의 8강전이 끝나자 단체 관람을 했던 나고야 초등학생들이 경기장을 나서고 있다. 권종오 기자
아시아 최대의 스포츠 축제 제20회 하계 아시안게임이 오는 19일 개회식을 시작으로 일본 아이치현과 나고야에서 화려한 막을 올린다.
일본 열도의 중심부에 자리한 나고야는 이른바 ‘낀 도시’로 불린다. 지리적으로 수도 도쿄와 오사카에 사이에 있을 뿐만 아니라 두 도시에 비해 존재감과 지명도가 낮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면을 들여다 보면 세계 외교사에 한 장을 연 도시이자 대한민국과 한국 스포츠에게는 정말 고마운 도시로 평가된다.
*냉전의 벽을 허문 1971년 나고야 '핑퐁 외교’
나고야는 스포츠가 어떻게 정치를 바꾸고 화해 무드를 조성할 수 있는지 증명한 세계사적 사건, '핑퐁 외교'의 고향이다. ‘죽의 장막’이 한창 높았던 1971년, 나고야에서는 제3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가 열렸다.
당시 미국 선수였던 글렌 코완이 실수로 중국 대표팀 버스에 탑승했고, 중국의 세계 챔피언 좡쩌둥이 그에게 먼저 악수를 청하며 선물을 건넸다.이 우연한 만남은 거대한 ‘나비 효과’를 불러왔다.
1972년 2월 중국 최고 지도자 마오쩌둥 주석(왼쪽)이 중국을 공식 방문한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마오쩌둥 중국 주석이 미국 탁구단을 베이징으로 전격 초청했고, 이는 이듬해 2월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베이징 방문과 ‘상하이 코뮤니케’(공동성명)의 길을 열었다.
‘상하이 코뮤니케’는 1972년 2월 28일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 중에 발표된 중요한 외교 문서였다. 양국이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관계 개선에 전념하여 궁극적으로 양국 간의 데탕트를 위한 토대를 마련함으로써 미국-중국 관계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20년 넘게 굳게 닫혀 있던 벽을 허물어 버리고 미국과 중국, 양국의 해빙기를 이끈 위대한 외교적 드라마의 첫 걸음이 나고야에서 시작된 것이다.
1981년 9월 서독 바덴바덴에서 열린 IOC총회에서 제24회 하계올림픽 서울 유치가 확정되자 한국 유치단이 환호하고 있다. 서울역사아카이브
*1981년 바덴바덴의 패배, 한국의 '결정적 은인'이 되다
대한민국 스포츠 역사에서는 1988년 서울올림픽을 빼놓을 수 없다. 서울올림픽 개최는 스포츠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국운을 바꾼 결정적인 사건이다.
서울과 나고야는 1988 하계올림픽을 유치를 놓고 정면 대결을 펼쳤다.
1981년 서독 바덴바덴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는 나고야의 압도적 우세가 예상됐다. 당시 국제 사회는 개발도상국이었던 한국보다 모든 면에서 나아 보였던 나고야의 압승이 유력했다.
그러나 승리를 확신했던 나고야가 방심한 틈을 타 한국 유치단은 필사적인 총력전을 펼쳤다.
결과는 '서울 52표, 나고야 27표'라는 역사적인 대역전승이었다.
올림픽 유치 실패는 나고야에게 심각한 굴욕과 아쉬움을 남겼지만, 한국에게는 기적의 예고편이었다.
서울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는 한국 스포츠가 엘리트 체육과 생활 체육 전반에서 세계적 수준으로 도약하는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다.
올림픽을 통해 한강의 기적을 세계에 증명하며 대한민국의 경제적 위상과 국제적 지명도는 엄청나게 뛰어올랐고, 선진국 반열에 진입하는 강력한 발판이 되었다.
이 대회에 중국은 물론 소련을 비롯한 동구 공산권 국가가 대거 참여하며 평화 무드를 조성했고 이는 베를린 장벽 붕괴와 소련 제국 및 동구 공산권 해체로 이어지는 역사적 분수령이 되었다.
역설적이게도 나고야의 쓰라린 패배가 오늘날 스포츠·경제 강국 대한민국의 초석을 다져준 '위대한 은인' 역할을 한 셈이다.
*올림픽 좌절을 '2005 아이치 만국박람회'로 만회하다
떼어 놓은 당상으로 여겼던 올림픽 유치 실패로 깊은 상처를 입었던 나고야와 아이치현은 그대로 주저앉지 않았다.
이들은 아쉬움을 만회하기 위해 대규모 국제 행사 유치에 사활을 걸었고, 마침내 '2005 아이치 만국박람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해 냈다.
단순한 기술 자랑을 넘어 '자연의 예지'를 주제로 내건 이 박람회는 전 세계에 '친환경 엑스포'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며 대성공을 거두었다.
올림픽의 유치 패배의 아픔을 딛고 친환경·첨단 기술 도시로서의 저력을 전 세계에 증명하며 독자적인 도시 브랜드를 확고히 구축한 순간이었다.
나고야 역 지하 계단에 아시안게임을 홍보하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권종오 기자
도쿄만큼 화려하지도, 오사카만큼 시끌벅적하지도 않은 나고야는 2026년 가을 다시 한번 아시아의 중심에 섰다.
나고야가 아시안게임이라는 국제종합대회를 개최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대회 슬로건은 ‘Imagine One Asia’(하나의 아시아를 상상하라).
나고야가 내건 슬로건처럼 아시아를 하나로 묶는 디딤돌이 될지 주목된다.
16일 남자 농구 한국과 요르단의 8강전이 끝나자 단체 관람을 했던 나고야 초등학생들이 경기장을 나서고 있다. 권종오 기자 아시아 최대의 스포츠 축제 제20회 하계 아시안게임이 오는 19일 개회식을 시작으로 일본 아이치현과 나고야에서 화려한 막을 올린다.
일본 열도의 중심부에 자리한 나고야는 이른바 ‘낀 도시’로 불린다. 지리적으로 수도 도쿄와 오사카에 사이에 있을 뿐만 아니라 두 도시에 비해 존재감과 지명도가 낮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면을 들여다 보면 세계 외교사에 한 장을 연 도시이자 대한민국과 한국 스포츠에게는 정말 고마운 도시로 평가된다.
*냉전의 벽을 허문 1971년 나고야 '핑퐁 외교’
나고야는 스포츠가 어떻게 정치를 바꾸고 화해 무드를 조성할 수 있는지 증명한 세계사적 사건, '핑퐁 외교'의 고향이다. ‘죽의 장막’이 한창 높았던 1971년, 나고야에서는 제3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가 열렸다.
당시 미국 선수였던 글렌 코완이 실수로 중국 대표팀 버스에 탑승했고, 중국의 세계 챔피언 좡쩌둥이 그에게 먼저 악수를 청하며 선물을 건넸다.이 우연한 만남은 거대한 ‘나비 효과’를 불러왔다.
1972년 2월 중국 최고 지도자 마오쩌둥 주석(왼쪽)이 중국을 공식 방문한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마오쩌둥 중국 주석이 미국 탁구단을 베이징으로 전격 초청했고, 이는 이듬해 2월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베이징 방문과 ‘상하이 코뮤니케’(공동성명)의 길을 열었다.
‘상하이 코뮤니케’는 1972년 2월 28일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 중에 발표된 중요한 외교 문서였다. 양국이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관계 개선에 전념하여 궁극적으로 양국 간의 데탕트를 위한 토대를 마련함으로써 미국-중국 관계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20년 넘게 굳게 닫혀 있던 벽을 허물어 버리고 미국과 중국, 양국의 해빙기를 이끈 위대한 외교적 드라마의 첫 걸음이 나고야에서 시작된 것이다.
1981년 9월 서독 바덴바덴에서 열린 IOC총회에서 제24회 하계올림픽 서울 유치가 확정되자 한국 유치단이 환호하고 있다. 서울역사아카이브 *1981년 바덴바덴의 패배, 한국의 '결정적 은인'이 되다
대한민국 스포츠 역사에서는 1988년 서울올림픽을 빼놓을 수 없다. 서울올림픽 개최는 스포츠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국운을 바꾼 결정적인 사건이다.
서울과 나고야는 1988 하계올림픽을 유치를 놓고 정면 대결을 펼쳤다.
1981년 서독 바덴바덴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는 나고야의 압도적 우세가 예상됐다. 당시 국제 사회는 개발도상국이었던 한국보다 모든 면에서 나아 보였던 나고야의 압승이 유력했다.
그러나 승리를 확신했던 나고야가 방심한 틈을 타 한국 유치단은 필사적인 총력전을 펼쳤다.
결과는 '서울 52표, 나고야 27표'라는 역사적인 대역전승이었다.
올림픽 유치 실패는 나고야에게 심각한 굴욕과 아쉬움을 남겼지만, 한국에게는 기적의 예고편이었다.
서울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는 한국 스포츠가 엘리트 체육과 생활 체육 전반에서 세계적 수준으로 도약하는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다.
올림픽을 통해 한강의 기적을 세계에 증명하며 대한민국의 경제적 위상과 국제적 지명도는 엄청나게 뛰어올랐고, 선진국 반열에 진입하는 강력한 발판이 되었다.
이 대회에 중국은 물론 소련을 비롯한 동구 공산권 국가가 대거 참여하며 평화 무드를 조성했고 이는 베를린 장벽 붕괴와 소련 제국 및 동구 공산권 해체로 이어지는 역사적 분수령이 되었다.
역설적이게도 나고야의 쓰라린 패배가 오늘날 스포츠·경제 강국 대한민국의 초석을 다져준 '위대한 은인' 역할을 한 셈이다.
*올림픽 좌절을 '2005 아이치 만국박람회'로 만회하다
떼어 놓은 당상으로 여겼던 올림픽 유치 실패로 깊은 상처를 입었던 나고야와 아이치현은 그대로 주저앉지 않았다.
이들은 아쉬움을 만회하기 위해 대규모 국제 행사 유치에 사활을 걸었고, 마침내 '2005 아이치 만국박람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해 냈다.
단순한 기술 자랑을 넘어 '자연의 예지'를 주제로 내건 이 박람회는 전 세계에 '친환경 엑스포'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며 대성공을 거두었다.
올림픽의 유치 패배의 아픔을 딛고 친환경·첨단 기술 도시로서의 저력을 전 세계에 증명하며 독자적인 도시 브랜드를 확고히 구축한 순간이었다.
나고야 역 지하 계단에 아시안게임을 홍보하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권종오 기자 도쿄만큼 화려하지도, 오사카만큼 시끌벅적하지도 않은 나고야는 2026년 가을 다시 한번 아시아의 중심에 섰다.
나고야가 아시안게임이라는 국제종합대회를 개최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대회 슬로건은 ‘Imagine One Asia’(하나의 아시아를 상상하라).
나고야가 내건 슬로건처럼 아시아를 하나로 묶는 디딤돌이 될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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